1997년 외환위기, 대통령은 왜 열흘 전에야 알았나 — 국가부도 위기의 전말

1997년 11월 중순의 어느 저녁, 청와대 관저는 유난히 조용했다고 전해진다. 김영삼 대통령이 강경식 경제부총리로부터 나라의 외환보유고가 실제로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정확히 어느 날, 어떤 표정으로 그 보고를 들었는지는 지금도 기록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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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유신을 무너뜨린 열흘 — 10·26의 도화선이 된 부산과 마산

1979년 10월 16일 오전, 부산대학교 정문 앞. 하늘은 흐렸고, 학생 수백 명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날이 유신정권의 마지막 열흘을 여는 첫 장면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각오만 있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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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 사건 총정리 — 한국전쟁 최악의 내부 비극, 청년들은 왜 굶어 죽었나

1950년 12월 초, 경상북도 어느 국도. 살얼음 낀 논둑 사이로 청년 수백 명이 줄지어 걷고 있었습니다. 등에는 얇은 담요 한 장, 발에는 다 해진 고무신뿐이었습니다. 인솔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저 걸음을 옮겼을 뿐, 그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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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쉰들러’ 현봉학과 메러디스 빅토리호 — 흥남철수, 화물선 한 척에 실린 14,000개의 목숨

1950년 12월 22일 밤, 함경남도 흥남 부두. 영하의 바닷바람 속에서 한 남자가 미군 지휘관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현봉학. 통역관이자 민사부 고문으로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날 그가 하려던 말은 통역의 범위를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무기와 병력을 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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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최후, 태백산 호랑이를 쓰러뜨린 것은 총이 아니었다

1908년 11월, 경상북도 영덕군 눈신면 인진리. 태백산 자락 작은 마을에 한 사내가 찾아듭니다. 오랜 벗의 집이었습니다. 문을 두드린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일본군이 그토록 잡고 싶어 하던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 문턱을 넘는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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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모든 것을 빼앗긴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 나혜석은 왜 행려병자로 죽었나

1948년 12월, 신원을 알 수 없는 노파 한 명이 병원에 실려 왔다. 기록에는 행려병자로 남았다.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유럽을 누비며 그림을 그렸고,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이름을 가졌던 여인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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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만 아는 당신이 모르는 독립운동가 — 60대 할머니 남자현의 단지혈서

1932년 가을, 만주 하얼빈. 한 노파가 손을 떨며 흰 천 위에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먹물이 아니었다. 방금 전 자신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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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6형제,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떠난 사람들 – 신흥무관학교와 뤼순 감옥의 기록

1910년 겨울, 서울 명동의 대저택 앞에 마차 여러 대가 줄지어 섰습니다. 짐을 싣는 손길이 분주했습니다. 이 집을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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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기자들이 ‘쓰지 못한’ 진실 — 광주 언론 통제의 역사와 기록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총성이 울렸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문과 TV 어디에서도 그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현장에 기자들이 분명히 있었는데도요.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계엄령과 함께 언론도 묶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하루 전날인 1980년 5월 17일 밤,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모든 언론사에는 군 검열관이 상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도검열반'이라는 이름으로 각 언론사에 파견된 이들은 기사 한 줄 한 줄을 사전에 검토했고, 5·18 관련 내용은 통째로 삭제하거나 내용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당시 계엄 당국이 언론에 내린 지침은 단호했습니다. '소요 사태'라고만 쓸 것, 사망자 수는 보도하지 말 것, 공수부대라는 단어도 쓰지 말 것. 기사를 쓰는 기자보다 지우는 검열관이 더 많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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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두 사람 —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1926년 봄, 도쿄 대심원 법정. 방청석이 꽉 찼다. 조선인 청년 박열과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가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조선 옷을 입고 있었다. 일본 제국의 법정에서, 제국에 굽히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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