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 6형제,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떠난 사람들 – 신흥무관학교와 뤼순 감옥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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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12일

1910년 겨울, 서울 명동의 대저택 앞에 마차 여러 대가 줄지어 섰습니다. 짐을 싣는 손길이 분주했습니다. 이 집을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명동의 대갓집, 나라가 무너지던 해

LeeHoeYeongOrig.pn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eeHoeYeongOrig.png">위키미디어 커먼즈</a>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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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은 조선 후기 명문가 경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고, 서울 명동 일대에 넓은 땅과 저택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아마 수백억 원에 이르는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습니다. 이회영에게는 형제가 다섯이 더 있었습니다. 건영, 석영, 철영, 시영, 호영. 여섯 형제는 나라를 잃은 그해, 아주 큰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섯 형제, 재산을 정리하다

형제들은 명동의 집과 땅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급하게 처분하다 보니 제값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나라 안에서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기반을 세우자는 계획이었습니다. 여섯 형제와 그 가족들, 노비까지 합쳐 아마 오십 명이 넘는 대가족이 함께 움직였습니다.

당시 조선 팔도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처분하고 떠난 집안 중 하나였다고 전해집니다.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1910년 12월, 형제들은 눈 쌓인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목적지는 서간도, 지금의 중국 지린성 유하현 삼원보였습니다. 낯선 땅, 낯선 겨울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대감댁 자제였던 이들이 이곳에서는 그저 이방인이었습니다.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에서 현지인들의 텃세와 마적의 위협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형제들은 정착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신흥무관학교, 독립군의 요람

Lee Hoe-yeong.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ee_Hoe-yeong.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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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형제들은 정착지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처음 이름은 신흥강습소였습니다. 이후 규모가 커지면서 신흥무관학교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학교에서 나온 청년들은 이후 만주 각지의 독립군 부대로 흩어졌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나선 이들 중 상당수가 이 학교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형제들이 팔아치운 재산은 이 학교의 교사와 무기, 학생들의 끼니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형제들에게 닥친 굶주림과 죽음

재산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대가족의 이주비와 학교 운영비는 생각보다 훨씬 컸습니다. 몇 해가 지나자 형제들의 살림은 눈에 띄게 기울었습니다.

이건영과 이철영은 만주에서, 혹은 그 여파 속에서 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석영은 말년에 상하이 거리에서 궁핍하게 지내다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집니다. 막내 이호영은 행방이 묘연해졌고, 끝내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뤼순 감옥, 이회영의 마지막

이회영은 형제들이 하나둘 스러지는 와중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32년, 예순이 넘은 나이로 다롄으로 이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뤼순 감옥으로 옮겨졌습니다. 혹독한 심문과 고문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체포된 지 오래지 않아, 그는 감옥 안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년 66세였습니다.

홀로 살아남은 형제, 이시영

여섯 형제 중 해방을 본 사람은 이시영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오랜 시간을 버텼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이 겪은 세월을 생각하면, 이시영에게 그 자리가 온전한 기쁨이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섯 형과 아우를 만주와 상하이 땅에 묻고 홀로 돌아온 자리였습니다.

우당이회영기념관에서 마주하는 흔적

서울에는 우당이회영기념관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남긴 문서와 유물, 신흥무관학교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화려한 유적은 아니지만, 한 집안이 얼마나 철저하게 스스로를 소진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 여섯 형제가 정리한 재산은 현재 가치로 아마 수백억 원대였을 것
  • 전 재산을 팔아 서간도로 집단 이주,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기반이 됨
  • 이회영은 1932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 다섯 형제 중 넷은 만주·중국 각지에서 사망
  • 유일한 생존자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역임

남는 이야기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후대에 어떻게 기록될지 알지 못한 채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재산을 지키는 쪽이 훨씬 쉬운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길을 택했고, 대부분 그 대가를 온몸으로 치렀습니다.

우당이회영기념관을 찾는 걸음 하나가, 이 여섯 형제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작은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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