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백교 사건, 교주는 왜 신도 수백명을 암매장했나

1937년 2월, 경기도 양주군 일대 야산에서 백골 사체가 무더기로 발굴됐습니다. 실종된 가족을 찾던 이들의 신고에서 시작된 수사였습니다. 발굴된 시신의 숫자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300명대에서 400명에 육박한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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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뒤에 가려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30년 도피와 순교

1864년 3월 10일, 대구 감영 관덕정.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혹세무민'이라는 죄목으로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조선 조정은 이 신흥 종교를 사교로 규정했고, 창시자의 죽음으로 동학은 그대로 끝나는 듯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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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리사와 근화여학교, 조혼과 축첩에 맞선 여성교육의 시작

1920년, 차미리사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전국을 도는 강연길에 올랐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되풀이했던 주제는 두 가지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보내는 조혼을 멈추라는 것, 그리고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두는 축첩의 관습을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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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영웅은 왜 카자흐스탄 극장 수위로 생을 마쳤나 — 홍범도의 마지막

1920년 6월 7일, 만주 봉오동 일대에서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독립군 연합부대와 일본군이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이 전투를 지휘한 인물이 홍범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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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를 쓴 그 시인이 실은 무장 투쟁가였다 — 수형번호 264, 이육사

1927년 10월,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뒤흔든 폭탄 사건이 일어납니다. 경찰은 한 청년을 용의자로 붙잡습니다. 이름은 이원록, 훗날 이육사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될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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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아리랑(1926), 한국 최초의 걸작이 필름 없이 전설로 남은 이유

1926년 10월 1일, 서울 종로의 단성사. 무성영화 '아리랑'이 처음 스크린에 걸렸습니다. 각본과 감독, 주연을 겸한 사람은 스물네 살의 나운규였습니다. 이날의 상영이 조선 영화계의 흐름을 바꿔놓게 되지만, 정작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이 필름이 훗날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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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광부와 간호사, 1960년대 서독으로 떠난 사람들 – 지하 1000m에서 부친 조국의 종잣돈

1963년 12월 21일, 김포국제공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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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은 왜 어린이날을 만들었나 – 서른셋에 세상을 떠난 ‘어린이의 벗’ 이야기

1923년 5월 1일, 서울 시내에 한 장의 선전문이 뿌려졌습니다. 조선소년운동협회의 이름으로 나온 이 인쇄물은 아이를 어른의 소유물처럼 다루던 관행을 멈추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기획한 사람은 20대 중반의 청년, 소파 방정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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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이상설에 가려진 세 번째 특사, 이위종

1907년 6월 말, 네덜란드 헤이그의 한 회의장 문 앞. 스무 살 청년이 프랑스어로 적은 원고를 손에 쥐고 서 있었습니다. 문 안에서는 만국평화회의 의장단이 대한제국 대표단의 회의 참석을 거부한 직후였습니다. 청년의 이름은 이위종. 아마 그 순간 그는, 조선의 목소리를 세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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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암살 사건 전말 — 좌우합작을 외치다 혜화동에서 스러진 몽양 여운형

1947년 7월19일 낮 12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습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 뙤약볕 아래 거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로터리를 돌고 있었습니다. 뒷좌석에는 몽양 여운형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회의 일정을 향해 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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