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2월, 경기도 양주군 일대 야산에서 백골 사체가 무더기로 발굴됐습니다. 실종된 가족을 찾던 이들의 신고에서 시작된 수사였습니다. 발굴된 시신의 숫자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300명대에서 400명에 육박한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을 죽인 것은 강도도, 살인마 개인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를 신이라 칭한 한 교주와 그를 따르던 신도들이었습니다. 백백교, 그리고 그 교주 전용해의 이야기입니다.
백백교의 뿌리 — 전정운, 그리고 갈라선 삼형제

백백교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종교가 아닙니다. 구한말 이후 등장한 백도교·청림교 계열의 신흥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계열을 이끌던 인물이 전정운이었습니다.
전정운은 191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신도와 조직은 하나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두고 각자 다른 길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장남 전용주는 인천교를, 차남 전용해는 백백교를, 나머지 형제는 도화교를 세워 따로 갈라섰습니다. 3대에 걸쳐 하나의 교주 자리가 순서대로 세습된 것이 아니라, 형제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두고 갈라선 결과였습니다.
전용해, 스스로 신이 되다
형제와 갈라선 전용해는 백백교를 자신만의 조직으로 키워나갔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살아있는 신, 절대적 구원자로 내세웠습니다.
신도들에게는 재산을 바치면 병이 낫고 복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여성 신도를 착취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백백교의 재산과 세력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전용해가 자신의 교단으로 직접 불려나간 결과였습니다.
믿음의 끝에서 벌어진 살인
문제는 교리에 의문을 품거나 교단을 떠나려는 신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직의 비밀을 지키지 못할 위험 인물로 지목됐습니다.
백백교 간부들은 이런 신도들을 산속 기도처로 유인해 살해하고 그 자리에 암매장했습니다. 경기도 일대 야산은 오랫동안 이들의 무덤이 됐습니다.
희생자 다수는 재산을 교단에 헌납한 뒤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확인된 사망자 수는 자료에 따라 300명 이상에서 400명에 이른다고 전해지며, 정확한 인원은 지금도 자료마다 엇갈립니다.
발각, 그리고 전용해의 최후
사건은 1937년, 실종된 신도 가족의 신고로 경찰 수사가 시작되며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수사가 진행되며 야산 곳곳에서 시신이 잇따라 발굴됐습니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전용해는 도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정확한 사망 경위는 자료마다 엇갈립니다. 도피 중 살해됐다는 설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이 함께 전해집니다.
이후 재판에서 백백교 간부들에게는 살인, 사기 등의 혐의로 중형이 선고됐습니다. 조선 사회 전체가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이런 종교가 가능했나
일제강점기 조선은 식민 통치 아래 사회 불안과 경제적 궁핍이 컸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구원과 치유를 앞세운 신흥종교가 곳곳에서 생겨났습니다.
백백교는 그중에서도 살인이라는 극단으로 치달은 사례로 남았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을 빌린 통제와 착취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이 사건은 뼈아프게 보여줍니다.
세습이 아니라 형제의 분열이 백백교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조직을 살인 집단으로 키운 건 전용해 한 사람의 선택이었습니다.
백백교 사건 핵심 정리
- 19세기 말~20세기 초: 백도교·청림교 계열 신흥종교 태동, 전정운 활동
- 1919년: 전정운 사망 — 아들 삼형제가 인천교·백백교·도화교로 분리
- 전용해: 형제와 별도로 백백교를 이끌며 스스로 신격화
- 1937년 2월: 경기도 양주 일대에서 암매장된 신도 시신 무더기 발굴
- 수사 착수 후: 전용해 도피, 곧 사망한 채 발견(사인은 자료마다 엇갈림)
- 이후 재판: 백백교 간부들 살인·사기 등 혐의로 중형 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