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 영웅은 왜 카자흐스탄 극장 수위로 생을 마쳤나 — 홍범도의 마지막

사이재

2026년 07월 23일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벌어진 일

홍범도 권총집.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홍범도_권총집.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 CC BY-SA 4.0 / Hyun616
홍범도 권총집.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홍범도_권총집.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 CC BY-SA 4.0 / Hyun616

1920년 6월 7일, 만주 봉오동 일대에서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독립군 연합부대와 일본군이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이 전투를 지휘한 인물이 홍범도였습니다.

결과는 독립군의 승리로 기록됐습니다. 일본군은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남기고 물러났습니다. 홍범도라는 이름이 국내외에 알려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여 년 뒤, 그는 고국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카자흐스탄의 한 극장에서 수위로 일하다 눈을 감았습니다. 전장의 기억과 말년의 모습 사이 이 간극이, 오늘 다룰 이야기의 출발점입니다.

포수에서 의병장으로 — 홍범도의 초기 행적

홍범도는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린 시절 가난 속에서 여러 일을 전전하다 함경도 산간지역에서 산포수 생활을 했습니다. 사냥으로 다져진 사격 실력은 훗날 의병 활동과 독립군 전투에서 중요한 자산이 됐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갔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07년에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시점에 벌어진 이 두 사건은 시차를 두고 국권을 잠식했고, 이 흐름 속에서 홍범도는 함경도 일대에서 의병을 조직해 무장 투쟁에 나섰습니다.

봉오동 전투, 그 실체

1920년 무렵 홍범도는 대한독립군을 이끌며 만주 일대에서 활동했습니다. 일본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봉오동 인근까지 추격해오자, 홍범도를 비롯한 지휘관들은 지형을 이용한 매복 작전을 세웠습니다.

전투 피해 규모를 두고는 자료마다 수치가 엇갈립니다. 당시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일본군 사망자를 100명 이상으로 보도했고, 일본 측 기록은 이보다 훨씬 적은 피해를 주장했습니다. 정확한 사상자 수는 지금도 학계에서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독립군이 조직적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 자체는 뒤집히지 않습니다.

청산리를 지나 소련 영내로

파일:Hong Beom-do 1921.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파일:Hong_Beom-do_1921.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퍼블릭 도메인)
파일:Hong Beom-do 1921.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파일:Hong_Beom-do_1921.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퍼블릭 도메인)

같은 해 10월, 인근 청산리에서도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봉오동과 청산리를 거치며 독립군의 존재는 국제적으로도 알려졌지만,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 보복과 토벌이 이어지며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를 옮겨야 했습니다.

1921년, 러시아 자유시(스보보드니)에서 독립군 부대 간 갈등이 무력 충돌로 번진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홍범도를 비롯한 상당수 독립군은 소련 영내에 남아 활동을 이어가게 됐습니다.

1937년, 강제이주 열차에 오르다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 일대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습니다. 일본과의 접경 지역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이 일본 첩자로 활용될 수 있다는 명분이었습니다. 이때 이주한 고려인은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17만 명 안팎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홍범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 고려인들과 함께 화물열차에 실려 카자흐스탄으로 이송됐습니다.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던 지휘관도, 국가 정책 앞에서는 한 명의 이주 대상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크질오르다의 극장 수위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홍범도는 크질오르다 지역에서 말년을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정미소 노동, 고려인 극장 수위 등 여러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때 수백 명의 독립군을 지휘했던 인물이 이역만리에서 극장 문을 지키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화려한 전적과 소박한 노년의 대비는, 국권을 잃은 민족이 겪어야 했던 이산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1943년, 고국을 그리며 눈을 감다

파일:건국훈장1대한민국장.pn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파일:건국훈장1대한민국장.png">위키미디어 커먼즈</a> · CC0 / Salamander724
파일:건국훈장1대한민국장.pn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파일:건국훈장1대한민국장.png">위키미디어 커먼즈</a> · CC0 / Salamander724

홍범도는 1943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오랫동안 크질오르다에 묻혀 있었습니다.

2021년 귀환, 그리고 흉상 논란

2021년, 홍범도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국내로 봉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78년 만의 귀향이었습니다.

이후 2023년에는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한 일부 기관에 세워진 홍범도 흉상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이력이 있다는 점이 논란의 핵심이었습니다. 독립전쟁을 이끈 공적과 이후 소련 체제에 편입됐던 이력을 어떻게 함께 평가할 것인가는 지금도 진행 중인 논의입니다.

봉오동의 총성과 크질오르다의 적막, 그 사이에 한 사람의 생이 있었다.

홍범도 연표 정리

  • 1868년 — 평양 출생 (전해지는 기록)
  • 1905년 — 을사늑약 체결, 외교권 상실
  • 1907년 —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 1920년 6월 7일 — 봉오동 전투
  • 1920년 10월 — 청산리 전투
  • 1921년 — 자유시 참변
  • 1937년 — 스탈린 정권의 고려인 강제이주, 카자흐스탄 이주
  • 1943년 —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별세
  • 2021년 — 유해 봉환, 대전현충원 안장
  • 2023년 —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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