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봄, 도쿄 대심원 법정. 방청석이 꽉 찼다. 조선인 청년 박열과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가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조선 옷을 입고 있었다. 일본 제국의 법정에서, 제국에 굽히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지진이 만든 재앙, 그리고 체포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도쿄와 요코하마를 덮쳤다. 규모 7.9로 추정되는 강진이었다. 지진과 뒤이은 화재로 10만에서 14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한다. 혼란 속에서 유언비어가 퍼졌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이 방화를 저지른다'.
자경단이 조직됐다. 조선인을 색출하고 학살했다. 정확한 피해 규모는 지금도 논란이지만, 수천 명의 조선인이 재난이 아니라 사람 손에 죽었다. 일본 정부는 계엄령과 함께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대거 검거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도 그 파도에 휩쓸렸다.
두 사람이 도쿄에서 만나기까지

박열은 1902년 경북 문경 출신이다. 3·1운동의 해에 열예닐곱 살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에서 막노동을 하며 아나키즘을 접했고, 조선인 청년들과 불령사(不逞社)를 결성했다. '불령(不逞)'은 일본 당국이 말 듣지 않는 조선인을 비하하던 표현이었다. 박열은 그 말을 스스로의 이름으로 삼았다.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요코하마 출신이다. 어린 시절을 조선에서 보냈고, 조선인의 삶을 일본인보다 가까이에서 목격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 아나키즘에 빠져들었고, 그 무렵 박열을 만났다. 두 사람은 연인이자 사상의 동지가 됐다. 결혼이라는 제도 대신 '동지로서의 결합'이라는 말을 택했다.
대역죄 —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
체포 초기 혐의는 폭발물 단속 위반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수사를 확대했다. 두 사람이 폭탄을 구해 당시 섭정이던 황태자 히로히토를 해치려 했다는 혐의가 더해졌다. 대역죄. 사형이 가능한 최중죄였다.
실제로 폭탄을 손에 넣었는지는 재판에서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증거는 빈약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신념을 더 당당하게 말했다. 황태자 암살 계획 여부보다, 자신들이 일본 천황제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살아서 굴복하는 것이 두렵다 —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 자서전에 남긴 말의 취지다.
법정에서 굴복하지 않은 두 사람
예심만 3년 가까이 걸렸다. 1926년 대심원에서 본격적인 공판이 시작됐다. 두 사람은 조선 옷 차림으로 출정했다. 재판장이 존칭 없이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박열이오'라고 스스로 정정했다. 일본 법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행위였다.
가네코 후미코는 더 날카로웠다. 자신은 일본 국가와 천황제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자라고 법정에서 선언했다. 조선인이라서가 아니라, 모든 권력 구조를 거부한다고 했다. 법정은 당혹스러웠다. 이 여성은 관대한 처우를 원하지 않았다. 동정도 거부했다.
한 장의 사진이 일으킨 파문

사진 한 장이 있었다. 두 사람이 미결수로 갇혀 있던 시기, 옥중에서 찍힌 것이었다. 서로 포옹한 채 책을 함께 들여다보는 모습이었다. 이 사진은 1926년 7월 말, 괴문서 형태로 일본 언론에 뿌려졌다.
일본 사회는 격분했다. 대역죄 피의자가 감옥에서 저런 모습으로 찍혔다는 것이 스캔들이 됐다. 사법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내각이 총사퇴해야 한다는 요구까지 나왔다. 사진은 곧 게재가 금지됐다가 이듬해 1월에야 신문에 실렸다. 누가, 무엇을 위해 찍은 사진인지는 자료마다 설명이 엇갈린다. 두 사람이 의도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결과적으로 그 사진은, 그들이 법정 밖에서도 굽히지 않았다는 가장 강렬한 증거가 됐다.
가네코 후미코의 마지막

1926년 3월 25일, 대심원은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열흘 남짓이 지난 4월 5일, 천황의 은사(恩赦)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박열은 감형을 받아들였다. 가네코 후미코는 거부했다. '천황의 자비는 필요 없다'고 했다.
그해 7월, 가네코 후미코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스물세 살의 짧은 생이었다. 공식 기록은 자살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후에도 의문은 남았다.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 다른 무언가가 있었는지. 사료가 멈추는 지점에서 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
역사가 두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
박열은 1945년 일본 패망 후 석방됐다. 22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후 재일본조선거류민단(민단)의 초대 단장을 맡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6·25전쟁 중 북으로 갔고 — 납북됐다는 기록과 스스로 넘어갔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 1974년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이름은 두 나라 어디에서도 편하게 기억되지 않았다. 너무 불편한 존재였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이었지만 일본 국가를 거부했고, 조선 독립을 지지했지만 민족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녀가 옥중에서 쓴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는 훗날 발굴돼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읽히게 됐다.
1926년 봄, 두 사람이 법정에 섰을 때 그들은 결말을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기억될지도 몰랐다. 그저 그 자리에서, 굽히지 않는 것만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