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암살 사건 전말 — 좌우합작을 외치다 혜화동에서 스러진 몽양 여운형

사이재

2026년 07월 18일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의 총성

파일:1934년 여운형.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파일:1934년_여운형.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 CC BY-SA 3.0 / 미상Unknown author
파일:1934년 여운형.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파일:1934년_여운형.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 CC BY-SA 3.0 / 미상Unknown author

1947년 7월 19일 정오 무렵, 서울 혜화동 로터리. 몽양 여운형은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근접 거리에서 총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나이 61세. 그는 총상을 입은 뒤 곧 숨을 거두었습니다. 범인은 19세 청년 한지근으로, 현장에서 곧 체포되었습니다.

해방된 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총성은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라, 해방 정국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사건이 됩니다.

몽양 여운형, 그는 누구였나

여운형은 1886년에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했고,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1944년에는 국내에서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조직해 해방 이후를 미리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해진 바로 그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해방 당일 곧바로 조직을 출범시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이미 얼마나 오래 이 순간을 준비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뒤이어 9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지만, 이는 미군정과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좌우합작, 불가능해 보인 길을 걷다

여운형의 묘.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여운형의_묘.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 CC BY-SA 3.0 / Sienic
여운형의 묘.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여운형의_묘.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 CC BY-SA 3.0 / Sienic

1946년, 여운형은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합니다. 미군정의 지원 아래 좌익과 우익을 아우르는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시도였습니다.

이념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던 시절, 중간에서 양측을 조정하려던 이 노선은 처음부터 험난했습니다. 좌익 강경파는 그를 미군정에 협조하는 온건파로 몰아붙였고, 우익 강경파는 반대로 좌익에 협력하는 인물로 공격했습니다.

결국 그는 좌우 양쪽 모두로부터 표적이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좌우합작이라는 이상은 그를 지지자보다 적을 더 많이 만드는 선택이었습니다.

반복된 테러, 죽음을 피해온 나날들

여운형이 해방 이후 여러 차례 테러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기록과 후대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 정확한 습격 횟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지만, 흔히 10회 안팎의 테러를 겪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47년 7월 19일의 피격은 그 마지막이자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위기를 넘겨온 그였기에, 이번에도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배후를 둘러싼 논쟁

파일:1919년 임시의정원.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파일:1919년_임시의정원.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퍼블릭 도메인)
파일:1919년 임시의정원.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파일:1919년_임시의정원.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퍼블릭 도메인)

체포된 한지근은 우익 계열과 연관된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단독으로 범행을 계획했는지, 배후 조직이 있었는지를 둘러싼 논란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재판과 처벌 과정에서도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전모가 완전히 규명되지 못한 채로, 해방 정국의 가장 상징적인 정치 테러 중 하나로 남게 됩니다.

좌우합작의 좌절, 분단으로 가는 길

여운형의 죽음 이후 좌우합작 운동은 사실상 동력을 잃습니다. 중간에서 통합을 시도할 구심점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후 정국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쪽으로 빠르게 흘러갔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분단은 고착화됩니다. 여운형의 암살은 통합의 길이 얼마나 좁고 위태로웠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좌우 양쪽 모두에서 표적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중간의 자리가 위태로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운형 암살 사건 핵심 정리

  • 1886년 — 여운형 출생
  • 1944년 — 건국동맹 비밀 조직
  • 1945년 8월 15일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 1945년 9월 —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 1946년 —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 조직
  • 1947년 7월 19일 —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 사망(향년 61세)
  • 1948년 — 남한 단독정부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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