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22일 밤, 함경남도 흥남 부두. 영하의 바닷바람 속에서 한 남자가 미군 지휘관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현봉학. 통역관이자 민사부 고문으로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날 그가 하려던 말은 통역의 범위를 한참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무기와 병력을 실어야 할 배에, 피란민을 태워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흥남이 마지막 항구가 된 이유

그해 가을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참전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뒤집혔습니다. 북진하던 유엔군과 국군은 후퇴를 시작했고, 함경도 일대에 있던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육로 퇴각로가 사실상 막힌 상황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바다였습니다. 흥남은 그렇게 마지막 항구가 됐습니다. 12월 중순부터 시작된 철수 작전에는 군인뿐 아니라 수만 명의 피란민이 몰려들었습니다.
현봉학, 알몬드 장군에게 피란민을 말하다
현봉학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출신 의사였습니다. 미군 통역과 민사 업무를 맡으며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 곁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군사 작전상 우선순위는 병력과 장비의 철수였습니다. 배의 공간은 제한돼 있었고, 피란민을 태우는 일은 계획에 없었습니다. 현봉학은 이 계획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알몬드 장군에게 피란민을 두고 떠나면 이들이 겪게 될 위험을 거듭 설명했다고 전해집니다. 정확한 대화 내용까지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가 여러 차례 간곡히 호소했다는 사실만은 여러 증언과 기록을 통해 확인됩니다.
무기 대신 사람을 택한 결단
결국 알몬드 장군은 결단을 내립니다. 배에 실려 있던 일부 군수물자와 장비를 부두에 내려놓고, 그 자리에 피란민을 태우기로 한 것입니다.
이 결정 하나로 흥남 부두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배에 오를 기회가 생겼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군사적 효율과 사람의 목숨 사이의 저울질이 사람 쪽으로 기운 순간이었습니다.
무기를 버리고 사람을 태우라는 결정은, 전쟁의 논리 안에서는 이례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정원 47명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이때 흥남을 떠난 배들 중 가장 극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SS Meredith Victory)호입니다. 이 배는 본래 화물 수송용으로 건조된 선박으로, 승무원 정원은 47명 안팎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1950년 12월 22일부터 23일 사이, 이 배에는 무려 1만 4천 명에 가까운 피란민이 올라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갑판과 화물칸까지 사람들로 가득 찬 채, 배는 무기나 식량을 거의 싣지 못한 상태로 흥남을 떠났습니다.
레너드 라루 선장과 크리스마스의 항해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지휘한 것은 레너드 라루 선장이었습니다. 그는 위험한 해역과 부족한 물자 속에서도 배를 무사히 남쪽으로 이끌었습니다.
항해 도중 다섯 명의 아기가 새로 태어났고,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배는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경상남도 거제도에 도착했습니다. 이 항해는 후에 '크리스마스 카고(Christmas Cargo)'라 불리며, 한 척의 배가 가장 많은 인원을 구조한 사례로 기록에 남게 됩니다.
라루 선장은 훗날 선원의 삶을 접고 수도사의 길을 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극한의 항해를 겪은 그가 남은 생을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지는, 자세한 기록보다 그 선택 자체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1·4후퇴, 그리고 '한국의 쉰들러'라 불리게 된 이름
흥남철수 이후에도 전선은 다시 흔들렸습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는 이른바 1·4후퇴가 이어졌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은 그렇게 반복됐고, 피란은 흥남 한 곳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흥남철수는 특별하게 기억됩니다. 군사 작전 속에서 민간인의 목숨을 지키려 한 결정이 실제로 관철됐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현봉학이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한국의 쉰들러'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자신의 손으로 배를 몰거나 지휘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정권자를 설득해 방향을 바꾼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배에 올랐던 수만 명의 피란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그날의 승선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흥남철수·메러디스 빅토리호 핵심 연표
- 1950년 10월~11월 — 중국군 참전, 유엔군·국군 북진 저지
- 1950년 12월 중순 — 흥남 지역 철수 작전 개시
- 1950년 12월 22일~23일 — 메러디스 빅토리호, 흥남에서 약 1만 4천 명 승선
- 1950년 12월 24일 — 흥남 철수 작전 완료
- 1950년 12월 25일 — 메러디스 빅토리호, 거제도 도착 ('크리스마스 카고')
- 1951년 1월 4일 — 서울 재함락, 1·4후퇴 시작
- 이후 — 현봉학, '한국의 쉰들러'로 불리며 기억됨
흥남 부두에서의 그 짧은 설득이 없었다면,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른 사람들의 이후는 지금과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의 호소와 한 지휘관의 결단,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의 선택이 겹쳐 만들어진 이 항해는,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사람이 사람을 살릴 수 있었던 드문 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