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채널 코리아노트에서 오셨다면, 여기가 그 영상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다 보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표는 외웠는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다고. 이 페이지는 그 사이를 메우려고 만들었습니다.
요약본도 아니고 암기표도 아닙니다. 그런 건 이미 인터넷에 넘치도록 많고, 저희가 더 잘 만들 자신도 없습니다. 대신 시험에 나오는 장면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을 한 명씩 세워 두려고 합니다.
영상은 한 편에 1분이 채 되지 않습니다. 시대순으로 늘어놓았으니 위에서부터 내려오시면 삼국에서 조선까지 한 번에 지나갑니다. 글이 완성된 편에는 아래에 「더 읽기」가 붙습니다 — 하루에 한 편씩, 시대를 하나씩 채워 가는 중입니다.
선사와 국가의 형성
돌 하나로 시대를 가르는 구간입니다. 문자 기록이 없어 남은 것이라고는 깨진 돌과 갈린 돌, 그리고 땅에 파 놓은 집터뿐인데, 시험이 묻는 것도 정확히 그 몇 가지를 짝지어 아느냐입니다.
돌을 깨던 사람들은 떠돌았고, 갈던 사람들은 머물렀습니다 — 구석기와 신석기
구석기와 신석기를 가르는 기준은 돌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깨서 만들면 뗀석기(구석기), 갈아서 만들면 간석기(신석기)이고, 주거도 함께 갈립니다 — 막집은 땅을 파지 않고 움집은 땅을 팝니다. 신석기 시작 연대는 자료에 따라 「기원전 8000년경」과 「서기전 1만 년 전후」로 갈리므로, 연대보다 유물과 주거의 짝을 먼저 외우는 편이 안전합니다.
무덤을 덮은 돌은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들을 말해 줍니다 — 청동기와 고인돌
덮개돌이 수십 톤에 이르는 무덤을 세우려면 수많은 사람이 동원돼야 했고, 그만한 사람을 부릴 수 있는 이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고인돌이 청동기 시대의 계급 발생과 군장(족장)의 등장을 보여주는 유물로 출제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시험은 고인돌·비파형동검·민무늬토기를 한 묶음으로 묻고, 세형동검과 잔무늬거울은 초기 철기 쪽에 놓아 갈라 냅니다.
삼국과 남북국
고구려·백제·신라, 그리고 발해까지. 남은 기록이 워낙 적어서 무덤 하나와 비석 한 개가 교과서 한 쪽을 채우는 시대입니다.
1,775자 중 32자 때문에 100년째 싸웁니다 — 광개토대왕릉비
비석에 새겨진 1,775자 가운데 32자를 두고 100년이 넘도록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작 이 비를 세운 사람은 광개토대왕이 아니라 아들 장수왕이었고, 414년에 아버지의 업적을 기려 세웠습니다. 비 이름에 아버지가 들어 있어 세운 사람까지 그로 착각하기 쉬운데, 시험이 묻는 자리도 정확히 거기입니다.
주인 이름이 적혀 있던 유일한 왕릉 — 무령왕릉
삼국의 왕릉은 여럿 남았지만,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던 무덤은 이곳 하나뿐입니다. 웅진(공주) 시기의 이 무덤은 돌이 아니라 벽돌로 쌓았는데, 그 양식은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건너온 것이었습니다. 백제가 누구와 어떻게 오갔는지를 무덤 한 기가 대신 말해 주는 셈입니다.
30만 5천이 쳐들어와 2,700명만 돌아갔습니다 — 살수대첩
30만 5천이 압록강을 건넜고,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2,700명이었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상대는 수나라 양제였고, 그 대군을 물길로 끌어들인 사람이 을지문덕이었습니다. 바로 아래 안시성 싸움과 상대(수·당)와 해(612·645)가 자주 뒤바뀌어 출제됩니다.
60일 걸려 쌓은 산을, 하루도 못 지켰습니다 — 안시성
요동성과 백암성이 차례로 무너진 뒤, 안시성은 석 달을 버텼습니다. 당군은 성벽보다 높은 흙산을 60일에 걸쳐 쌓아 올렸는데, 그 산을 지킨 시간은 하루가 되지 않았습니다. 흔히 성주를 ‘양만춘’이라 부르지만 그 이름은 조선 시대 기록에 와서야 나타나므로, 저희는 단정해서 쓰지 않습니다.
오천으로 오만을 네 번 이겼는데, 나라는 그날 망했습니다 — 황산벌
계백의 오천이 김유신의 오만을 네 번 막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이 끝난 뒤 사비성이 함락됐고, 의자왕은 당으로 끌려갔습니다. 이긴 기록과 나라가 망한 날짜가 같은 자리에 나란히 놓이는, 흔치 않은 전투입니다.
삼천궁녀는 진짜 삼천 명이었을까?
낙화암에서 삼천 명이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사서에 없습니다. ‘삼천궁녀’는 조선 시대 문인의 시적 표현에서 굳어진 말이고, 남은 기록이라고는 『삼국유사』가 인용한 「백제고기」의 타사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정작 백제 멸망 문제에서 답이 되는 것은 이 숫자가 아니라, 복신·도침·흑치상지가 이어간 부흥운동과 663년 백강 전투입니다.
첫 싸움은 졌는데, 22번을 더 싸웁니다 — 삼국통일 매소성·기벌포
당은 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진 자리를 그대로 가지려 했고, 신라는 어제의 동맹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첫 싸움은 졌지만 이후 스물두 번을 더 싸웠고, 675년 매소성에서 육지를, 676년 기벌포에서 바다를 막아냈습니다. 이 둘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 나당전쟁입니다.
100년 전에 망한 나라의 왕에게 편지가 옵니다 — 발해
698년 대조영이 세운 나라는 스스로를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고 밝혔고, 일본에 보낸 국서에도 그렇게 적었습니다. 100년 전에 망한 나라의 왕에게 편지가 오는 셈이었습니다. 뒷날 당에서 ‘해동성국’이라 부를 만큼 커졌는데, 시험에서는 이 별칭과 고구려 계승 의식이 늘 함께 나옵니다.
고려
고려는 사백칠십여 년을 갑니다. 그 사이 거란·여진·몽골이 차례로 밀려왔고, 밀어낼 때마다 나라의 성격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기록에 80만이라 적힌 군대를, 한 사람이 말로 돌려보냅니다 — 서희의 담판
기록에 80만이라 적힌 군대 앞에서, 서희는 칼 대신 말로 마주 앉았습니다. 고려가 고구려를 잇는 나라라는 것과, 거란과 통하지 못하는 까닭이 여진 때문이라는 것을 짚어 물러가게 했고, 그 자리에서 강동 6주를 얻어 돌아옵니다.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때 일입니다.
10만이 쳐들어왔는데, 살아서 돌아간 건 수천이었습니다 — 강감찬의 귀주대첩
거란의 세 번째 침입은 10만으로 시작해, 살아 돌아간 수가 수천에 그쳤습니다. 이 싸움을 지휘한 강감찬은 그때 이미 일흔을 넘긴 나이였습니다. 서희의 담판이 1차, 귀주대첩이 3차 — 같은 거란이지만 시기가 달라 시험에서 자리를 바꿔 내기 좋은 짝입니다.
수도를 옮기자는 말이, 결국 반란이 됐습니다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수도를 옮기자는 말로 시작해 반란으로 끝났습니다. 묘청은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쓰고, 금을 치자고 했습니다. 서경 천도·칭제건원·금국 정벌 — 1135년의 이 세 가지 요구가 한 사람의 이름에 묶여 남았습니다.
임금을 따라나선 자리에서, 문신 50여 명이 죽었습니다 — 무신정변
보현원으로 가는 길, 임금을 따라나선 자리에서 문신 50여 명이 죽었습니다. 1170년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이 일으킨 일이고, 이후 100년 가까이 무신들이 정권을 쥡니다. 이 자리를 ‘잔치’라고 옮겨 쓴 자료도 있지만 행차를 잔치로 볼 근거는 없어, 저희는 그렇게 쓰지 않습니다.
16년에 8만 장, 그런데 오탈자가 없다 — 팔만대장경
8만 장이 넘는 목판을 16년에 걸쳐 새겼는데, 오탈자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앞서 만든 초조대장경이 불타 버린 뒤 다시 새긴 것이라 재조대장경이라고도 부릅니다. 판을 보관하는 장경판전과 판 자체는 유네스코에서 등재된 목록이 서로 다릅니다.
임금이 개경으로 돌아간 뒤, 자기들만의 왕을 세운 군대 — 삼별초
개경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은 군대가 있었습니다. 1270년 몽골과 강화한 원종이 환도를 공표하자 삼별초는 불복했고, 정부는 엿새 뒤 이들을 혁파합니다. 그러자 배중손이 왕족 승화후 온을 새 임금으로 세웠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진도에서 제주로 밀려가며 삼 년 가까이 버텼습니다 — 시험이 묻는 것도 그 이동 순서입니다.
몽골 이름을 가진 왕이, 몽골 옷을 금지합니다 — 공민왕의 반원 정책
몽골식 이름을 가진 왕이 몽골식 옷차림부터 금지했습니다. 1352년 변발과 호복을 폐기했고, 1356년에는 친원 세력의 기철을 제거하고 원이 세운 관청(정동행성 이문소)을 없앤 뒤 100년 가까이 원의 땅이던 쌍성총관부를 되찾습니다. 밖으로 되찾은 것이 땅이라면 안으로 되찾으려 한 것은 사람이어서, 1366년의 전민변정도감은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를 주인에게 돌리고 노비가 된 이를 양민으로 되돌리려 한 기구입니다 — 시험은 이 둘을 한 선지에 섞어 냅니다. 다만 전민변정도감이 이때 처음 생긴 것은 아니어서, 원종 때 이미 설치된 적이 있습니다.
나라가 쓸 화약 만드는 법을, 관리 한 사람이 항구에서 수소문했습니다 — 최무선
화약은 이미 알려져 있었는데 고려는 만들지 못했습니다. 재료 셋 가운데 흙에서 초석(염초)을 뽑아내는 법만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무선은 벽란도에 나가 중국에서 오는 상인들 중에 그 법을 아는 사람을 찾았고, 강남에서 온 이원에게서 제조법을 얻습니다. 1377년 화통도감이 서고 1380년 진포에서 그 화포가 배에 실리는데, 시험은 이 두 해를 짝지어 냅니다. 다만 진포에 온 왜선의 수는 자료가 갈려(300여 척 / 500여 척) 저희는 숫자를 쓰지 않습니다.
고려의 도공은 무늬를 그리지 않고, 파냈습니다 — 고려청자
고려청자를 가르는 기준은 무늬의 유무가 아니라 무늬를 넣는 방법입니다. 흔히 순청자를 ‘무늬가 없는 청자’로 외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 순청자에도 표면을 새기거나(음각) 도드라지게(양각) 넣은 무늬가 있습니다. 국보인 청자 참외모양 병도 병목에 가로선이 세 줄 음각돼 있습니다. 상감청자는 표면을 파낸 자리에 흰 흙과 붉은 흙을 채우고 넘친 흙을 긁어낸 뒤 유약을 발라 구운 것이어서, 갈라 보는 기준은 ‘상감이 있는가’입니다. 12세기 전반의 비색 순청자에서 12세기 중엽의 청자 상감으로 넘어가며, 가마터로는 강진 고려청자 요지(전남 강진군)와 부안 유천리 요지(전북 부안군)가 함께 출제됩니다. 다만 상감기법이 ‘개발’된 해는 자료가 갈려(우리역사넷은 12세기 중엽 개발, 백과사전은 12세기 전반 발생·중엽 최성기) 저희는 연대를 단정하지 않습니다.
구텐베르크보다 78년 빨랐던 책 — 직지심체요절
구텐베르크의 인쇄본보다 78년 앞선 금속활자 인쇄본이고, 지금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라는 조건이 중요한데, 기록으로만 전하는 『상정고금예문』이 시기로는 더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를 가려내는 문제가 자주 나옵니다.
조선
조선은 기록이 많은 시대입니다. 실록과 의궤가 남아 있어서, 누가 무엇에 반대했는지까지 이름이 남습니다.
노비에서 조선 최고 과학자로, 그리고 사라졌다 — 장영실
동래현의 관노였던 사람이 종3품 대호군까지 올랐습니다. 자격루가 스스로 시각을 알리고, 앙부일구가 해 그림자로 시간을 읽고, 측우기가 빗물의 양을 재던 시절입니다. 1442년 임금이 탄 가마가 부서진 일로 처벌받은 뒤, 그는 기록에서 사라집니다.
한글은 모두가 환영했을까? — 훈민정음 반대 상소 실화
새 문자를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1444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려, 중국과 다른 문자를 쓰는 것은 사대에 어긋나고 이두로도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창제는 1443년, 반포는 1446년 — 이 두 해가 다르다는 점이 늘 문제로 나옵니다.
나라가 무너지는 데 8일, 농민이 창을 든 것도 8일 — 임진왜란 의병
나라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데 여드레가 걸렸고, 농민이 창을 든 것도 그 여드레 안이었습니다. 곽재우는 의령에서 붉은 옷을 입고 정암진을 막았고, 조헌은 옥천에서 일어나 승장 영규와 청주성을 되찾은 뒤 금산에서 700명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그 700명이 묻힌 곳이 칠백의총입니다.
13척으로 133척을 막은 방법 — 명량대첩
열세 척으로 133척을 상대했습니다. 좁은 물목과 조류를 읽어낸 것이 배 숫자의 차이를 메웠습니다. 이 싸움은 1597년 정유재란에 속해서, 1592년 한산도대첩과 시기를 갈라 묻는 문제가 자주 나옵니다.
좋은 법인데 전국에 퍼지는 데 100년 — 대동법
좋은 법이었는데 전국에 퍼지는 데 100년이 걸렸습니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시작해 숙종 때에야 전국으로 갔고, 그 사이를 막은 것은 논리가 아니라 이해관계였습니다. 공납을 쌀로 바꾼 것이 대동법이라, 전세를 손댄 영정법·군역을 손댄 균역법과는 건드린 대상 자체가 다릅니다.
51년을 다스린 임금이 그 세월을 쓴 곳 — 탕평책
쉰한 해를 다스린 임금이 그 세월의 상당 부분을 신하를 어떻게 앉힐 것인가에 썼습니다. 영조는 시비를 따지지 않고 양쪽 온건파를 고루 썼고, 정조는 옳고 그름을 가려서 썼습니다. 성균관 앞에 세운 탕평비와, 규장각·초계문신제가 각각 그 흔적입니다.
“아껴 쓰면 나라가 가난해진다” — 200년 전 조선이 한 말
“아껴 쓰면 나라가 가난해진다”는 말이 200년 전 조선에서 나왔습니다. 땅 문제를 파고든 쪽에는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이 있었고, 장사와 기술을 말한 쪽에는 수레와 배를 이야기한 박지원, 소비를 권한 박제가가 있었습니다. 같은 시대에 정반대의 처방이 나란히 나왔다는 것이 이 시기의 특징입니다.
10년 걸릴 성을 2년 9개월에 — 정조의 수원 화성
10년이 걸린다던 성을 2년 9개월 만에 쌓았습니다.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가 돌을 들어 올렸고, 들어간 비용과 인부의 이름까지 『화성성역의궤』에 남았습니다. 장용영·규장각과 함께, 정조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가 이 성 하나에 모여 있습니다.
이 페이지의 영상과 글은 매일 조금씩 늘어납니다. 사실 확인과 정정을 어떻게 하는지는 편집 원칙에, 코리아노트가 어떤 곳인지는 소개에 적어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