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한능검에 이렇게 나옵니다 — 배경부터 정리

사이재

2026년 08월 01일

1971년 여름, 공주 송산리에서 일어난 일

무령왕릉 목관 2024.jpg ·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 CC BY 4.0 / ChongDae
무령왕릉 목관 2024.jpg ·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 CC BY 4.0 / ChongDae

1971년 7월, 충남 공주 송산리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벽돌 구조물이 드러났습니다. 장마철 침수 피해를 막기 위해 인근 5호분과 6호분 주변의 물길을 정비하려던 작업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이 자리에 어떤 무덤이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발견된 무덤은 놀랍게도 도굴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도굴되지 않은 채로 발견된 사례는 매우 드뭅니다. 무덤 입구를 열자 학계와 국민 모두를 놀라게 한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지석 두 장이 밝힌 무덤의 주인

Gold Earrings of King Muryeong 무령왕 금귀걸이 ·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 CC BY-SA 2.0 / pressapochista
Gold Earrings of King Muryeong 무령왕 금귀걸이 ·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 CC BY-SA 2.0 / pressapochista

무덤 안에서는 돌로 만든 판, 즉 지석 두 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사마는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의 이름이며, 지석에는 그가 세상을 떠난 해도 함께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의 이름이 문자로 명확히 확인된 사례는 무령왕릉이 유일합니다.

벽돌무덤이라는 낯선 양식과 남조 양나라

Gold Earrings of King Muryeong 무령왕 금귀걸이 ·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 CC BY-SA 2.0 / mentaldesperado (a flickr user)
Gold Earrings of King Muryeong 무령왕 금귀걸이 ·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 CC BY-SA 2.0 / mentaldesperado (a flickr user)

무령왕릉은 돌이 아니라 벽돌을 쌓아 만든 무덤입니다. 벽돌을 아치형으로 쌓아 올린 이 무덤 양식은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덤 양식과 닮아 있습니다. 당시 백제가 중국 남조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물증으로 꼽힙니다.

무덤 입구 널길에는 각섬석암(화성암의 일종)을 깎아 만든 돌짐승, 즉 진묘수 한 마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 진묘수는 국내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출토된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덤을 지키는 상상 속 동물로, 죽은 이를 나쁜 기운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백제 도읍 이동과 고분 양식의 변화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가 한성, 지금의 서울 지역에서 나라를 세운 뒤 이곳을 오랫동안 도읍으로 삼았습니다. 한성 시기에는 계단식으로 돌을 쌓아 올린 돌무지무덤이 주로 조성되었으며, 서울 석촌동 고분군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면서 백제는 위기를 맞습니다. 백제는 도읍을 웅진, 지금의 공주로 옮겼습니다. 웅진 시기에는 무령왕릉처럼 벽돌로 쌓은 무덤과 함께, 돌로 널길과 방을 만든 굴식돌방무덤도 함께 조성되었습니다.

이후 538년, 성왕은 다시 사비, 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사비 시기에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처럼 규모가 작아진 굴식돌방무덤이 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렇듯 백제의 고분 양식은 도읍 이동과 함께 계속 변화했습니다.

  • 기원전 18년 — 온조, 한성(위례성)에서 백제 건국, 계단식 돌무지무덤 조성(석촌동 고분군)
  • 475년 —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한성 함락, 개로왕 전사, 웅진(공주)으로 천도
  • 501~523년 — 무령왕 재위, 22담로 설치와 남조 양나라 외교로 국력 회복
  • 523년 — 무령왕 사망(지석 기록)
  • 538년 — 성왕, 사비(부여)로 재천도, 능산리 고분군(굴식돌방무덤) 조성
  • 1971년 7월 — 송산리 무령왕릉 발견, 도굴 피해 없이 원형 보존

무령왕, 웅진 백제를 다시 일으키다

무령왕은 501년부터 523년까지 재위하며 웅진 천도 이후 흔들리던 백제의 국력을 되찾는 데 힘썼습니다. 지방 요충지에 22개의 담로를 두고 왕족을 보내 다스리게 하며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중국 남조 양나라와 외교 관계를 회복하고 사신을 주고받으며 국제적 위상을 다졌습니다.

지석의 기록에 따르면 무령왕은 52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덤에는 무령왕과 왕비가 함께 묻혀 있었으며, 두 사람에 관한 기록이 지석에 각각 남아 있었습니다.

삼국시대 왕릉 중 무덤 주인의 이름이 문자로 확인된 사례는 무령왕릉이 유일합니다. 한능검에서는 이 점이 자주 출제 포인트로 다뤄집니다.

확인 문제

아래 문제의 답은 모두 이 글 본문에 있습니다.

1. 무령왕릉이 처음 발견된 시기와 계기로 옳은 것은?

  1. 1971년 7월,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2. 1945년 광복 직후, 학술 조사 중 발견되었다
  3. 1996년, 도굴범에 의해 존재가 알려졌다
  4.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사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정답 보기

정답: 1971년 7월,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1971년 7월, 충남 공주 송산리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벽돌 구조물이 드러났습니다.

2.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새겨진 문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은?

  1. 무덤 주인이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즉 무령왕이라는 사실
  2. 무덤이 신라 왕족의 것이라는 사실
  3. 무덤이 만들어진 정확한 위치와 설계자
  4. 무덤 안 부장품의 총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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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무덤 주인이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즉 무령왕이라는 사실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3. 무령왕릉의 벽돌무덤 양식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설명되는 대상은?

  1.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덤 양식
  2. 고구려의 돌무지무덤 양식
  3.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양식
  4. 일본 고훈시대 전방후원분 양식
정답 보기

정답: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덤 양식
벽돌을 아치형으로 쌓아 올린 이 무덤 양식은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덤 양식과 닮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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