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최남선이 펴내던 잡지 청춘(靑春)의 현상문예 공모 결과가 발표됩니다. 당선작은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 작가의 이름은 김명순, 평양 출신의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정식 등단 절차를 거쳐 이름을 알린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로 문학사에 기록됩니다.
그런데 이 당선의 순간은, 그가 이후 겪게 될 오랜 수난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은 여성 작가에게 문단이 마련해 준 자리는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평양의 서녀, 서울을 거쳐 도쿄로

김명순은 1896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지역에서 알려진 부호였고, 어머니는 기생 출신이었습니다. 당시의 신분 질서 속에서 그는 정실 소생이 아닌 서녀로 자랐습니다.
국내에서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 계열 등이 거론되지만 세부 사항은 문헌마다 엇갈립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이후 도쿄로 건너가 유학길에 올랐다는 점입니다. 당시 조선 여성으로서는 극히 드문 선택이었습니다.
유학 중 낙인이 된 사건
도쿄 유학 시절이던 1910년대 중반, 김명순이 성폭행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이 조선인 사회와 문단 안팎에 알려지게 됩니다. 가해자의 신원을 두고는 자료마다 다른 주장이 엇갈려 오늘날까지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사건 이후의 반응이었습니다. 피해자인 그에게 오히려 '행실이 방정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따라붙었습니다. 이 낙인은 이후 그가 정식으로 문단에 들어선 뒤에도 꼬리표처럼 그를 뒤쫓았습니다.
청춘 당선, 그리고 다시 시작된 손가락질

1917년 청춘 현상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이름을 올린 김명순은, 1919년 창간된 동인지 창조에 참여하고 잡지 개벽 등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문단 내 남성 중심의 시선은 그를 작가로서보다 소문 속 인물로 먼저 소비했습니다.
당시 문단을 주도하던 인물들은 대부분 남성 지식인이었습니다. 이광수, 최남선을 비롯한 이들이 근대문학의 방향을 결정하던 시기, 여성 작가 한 사람의 사생활은 문단 안에서 손쉬운 뒷담화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김동인의 소설 속에서 다시 조리돌림당하다
그를 향한 공격은 사적인 소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1939년, 소설가 김동인은 잡지 문장(文章)에 단편소설 '김연실전'을 발표합니다. 문학사 연구자들은 이 작품의 주인공이 김명순을 모델로 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합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허영심 많고 행실이 문란한 신여성으로 그려졌습니다. 실존 인물의 상처와 사생활을 허구의 이름 뒤에 감춘 채, 대중 앞에 다시 세워놓은 셈이었습니다. 동료 문인이었어야 할 남성 작가가 여성 작가를 조롱의 소재로 삼은 이 사례는, 이후 근대문학사에서 '문인에 의한 문인 공격'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됩니다.
김동인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여러 연구는 당대 일부 남성 문인들이 그의 사생활을 소재 삼아 글을 쓰거나 뒷말을 보탰다고 지적합니다. 신여성에게 유독 가혹했던 이중잣대와, 형성기 근대문단의 남성 중심적 질서가 겹쳐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최초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 이름을 지킬 자리는 문단 어디에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손가락질 속에서도 남긴 것들

그럼에도 김명순은 창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25년에는 시와 산문을 묶은 '생명의 과실'을 펴냈는데, 이는 한국 여성 작가가 낸 최초의 개인 작품집 중 하나로 꼽힙니다.
그의 작품 다수는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억압과 고통을 다룹니다. 스스로 겪은 낙인과 편견의 경험이 창작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국에서 맞은 쓸쓸한 결말
문단에서 밀려난 그는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생활고와 정신적 고통 속에 지내다 1951년 무렵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지지만, 정확한 사망 일자와 장소는 자료마다 엇갈려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최초의 여성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얻고도, 그의 죽음은 조선 문단 어디에서도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김명순 연보 정리
- 1896년 평양 출생, 부호의 서녀로 성장
- 도쿄 유학 중 성폭행 피해 사건과 그에 따른 사회적 낙인 발생(가해자·시기 자료마다 상이)
- 1917년 잡지 청춘 현상문예에 단편 '의심의 소녀' 당선, 정식 등단
- 1919년 동인지 창조 참여
- 1925년 시·산문집 '생명의 과실' 발간
- 1939년 김동인 '김연실전' 발표, 그를 모델로 한 부정적 형상화 논란
- 1951년 무렵 일본에서 사망(정확한 일자·장소 불명확)
김명순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개인사이자, 근대 문단이 여성 작가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최초라는 수식어 뒤에 가려진 수난의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지금 우리가 그의 작품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