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차미리사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전국을 도는 강연길에 올랐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되풀이했던 주제는 두 가지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보내는 조혼을 멈추라는 것, 그리고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두는 축첩의 관습을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유학과 독립운동, 차미리사가 걸어온 길

차미리사는 1879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뒤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이후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에서는 캔자스시티의 스캐리트 성경학교(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에서 수학하며 신학과 교육학을 익혔습니다. 동시에 재미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조직에 참여하며 여성으로서 사회 활동의 폭을 넓혀갔습니다.
1917년 무렵 귀국한 그는 배화여학교(배화학당) 교사로 일하며 조선 여성들의 현실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됩니다. 문맹, 조혼, 축첩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처지가 그를 교육운동으로 이끈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혼과 축첩, 근대 조선 여성이 짊어진 굴레
20세기 초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대개 십대 초반에 혼인했습니다. 집안의 결정에 따라 얼굴도 모르는 남성과 맺어지는 일이 흔했고, 이는 여성의 교육 기회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구조였습니다.
축첩 역시 법적으로 금지되지 않은 채 관습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본처와 첩 사이의 갈등, 자녀들의 신분 차별은 당대 여성들이 감당해야 했던 또 다른 무게였습니다. 차미리사는 이 두 가지를 여성 억압의 핵심 고리로 지목하고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습니다.
조선여자교육회, 전국을 돈 순회강연
1920년, 차미리사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하고 스스로 앞장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을 이어갔습니다. 글을 모르는 여성들을 위한 야학, 이른바 부인야학강습소도 함께 운영하며 문맹 퇴치와 여성 계몽을 동시에 추진했습니다.
당시 여성이 대중 앞에서 사회 문제를 발언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차미리사의 강연은 단순한 계몽 활동을 넘어, 여성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근화여학교의 설립 — 1920년에서 1921년 사이
조선여자교육회의 활동은 정규 여성교육기관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문을 연 것이 근화여학교입니다. 설립 시점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기록이 조금씩 다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20년 4월 18일 근화여학교로 설립되었다고 전하고, 다른 기록에서는 1920년 8월 인가를 받아 1921년 10월 정식으로 개교했다고 밝힙니다. 두 기록 모두 공통적으로 확인해 주는 사실은 근화여학교가 1920년에서 1921년 사이, 즉 3·1운동 직후의 시기에 세워졌다는 점입니다.
학교 이름 '근화(槿花)'는 무궁화를 뜻합니다. 나라꽃의 이름을 여학교에 붙인 데는 여성교육을 통해 민족의 미래를 키우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근화에서 덕성으로 — 이름을 빼앗긴 사연
근화여학교는 이후 근화여자실업학교로 개편되며 교육 체계를 갖춰갔습니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 일제는 '근화'라는 이름이 무궁화를 연상시켜 민족의식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개명을 압박했습니다.
결국 학교는 '덕성'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됩니다. 원치 않는 개명이었지만, 학교는 이름을 바꾼 뒤에도 여성교육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 덕성이라는 이름이 오늘날 덕성여자대학교로 이어지고 있으며, 근화여학교는 곧 덕성여대의 전신으로 평가받습니다.
차미리사가 남긴 유산
차미리사는 해방 이후에도 여성교육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고, 195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근화·덕성의 뿌리가 된 교육 정신을 지켜냈습니다. 그가 강조했던 것은 화려한 이론이 아니라, 여성이 스스로 글을 읽고 판단할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조혼과 축첩에 맞서 여성에게 배움의 기회를 열어주는 것 — 그것이 차미리사가 평생을 걸었던 방향이었습니다.
한눈에 보는 차미리사와 근화여학교 연표
- 1879년 — 차미리사 출생(서울)
- 미국 유학 — 캔자스시티 스캐리트 성경학교 수학, 재미 한인 독립운동 참여
- 1917년 무렵 — 귀국, 배화여학교 교사로 활동
- 1920년 — 조선여자교육회 설립, 전국 순회강연 및 부인야학 운영 시작
- 1920~1921년 — 근화여학교 설립(자료에 따라 1920년 4월 또는 1920년 8월 인가·1921년 10월 개교로 기록)
- 1930년대 후반 — 일제의 압박으로 '덕성'으로 교명 변경
- 1955년 — 차미리사 별세
근화여학교의 출발점을 되짚어 보면, 한 여성이 조혼과 축첩이라는 관습에 맞서 세운 교육의 씨앗이 오늘날의 덕성여자대학교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이름은 근화에서 덕성으로 바뀌었지만, 여성에게 배움의 길을 열겠다는 처음의 뜻만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