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2월 21일, 김포국제공항이었습니다.
이날 젊은 남성 수백 명이 서독행 여객기에 올랐습니다. 행선지는 서독 루르 지방의 탄광 지대였습니다.
당시 500명 모집에 4만6천여 명이 지원할 만큼 경쟁이 치열했고, 이날 1진으로 출국한 인원은 123명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서명한 계약서의 직업란에는 '광부'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던 그 순간, 이 선택이 훗날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왜 하필 광부와 간호사였을까

1960년대 초 한국은 심각한 실업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반대로 서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성장을 겪으며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탄광 노동과 병원 간호 인력이 크게 부족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1963년 한국과 서독 정부는 인력 파견에 관한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인 광부와 간호 인력이 서독으로 건너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지하 1000미터, 낯선 언어 속의 하루
서독에 도착한 광부들은 곧바로 루르 지방의 탄광으로 배치됐습니다. 근무지는 지하 800에서 1000미터 안팎의 갱도였습니다.
채탄 작업은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이루어졌고, 낙반과 분진 사고의 위험도 상존했습니다. 독일어를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로 투입된 이들도 많았습니다.
선발 경쟁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대학 졸업자나 군 장교 출신이 광부로 지원한 사례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에게 광부라는 직업은 생계이자, 동시에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였습니다.
간호사들의 서독행, 1966년 이후
간호 인력의 파독은 광부보다 조금 늦게,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됐습니다. 초기에는 간호보조 인력 위주였고, 이후 정식 간호사 자격을 갖춘 인력의 파견으로 확대됐습니다.
이들은 서독 각지의 병원에 배치되어 환자를 돌보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언어 장벽과 문화 차이를 감수하며 근무해야 했습니다.
1963년부터 1977년 사이 서독으로 건너간 인원은 광부가 약 7,900여 명, 간호 인력이 약 1만여 명으로 집계됩니다. 다만 정확한 수치는 자료마다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조국으로 보낸 돈, 그리고 차관을 둘러싼 이야기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급여의 상당 부분을 고국으로 송금했습니다. 이 송금액은 당시 외화가 부족했던 한국 경제에 실질적인 보탬이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한편 1960년대 초 서독이 한국에 상업차관을 제공하기로 했을 때, 신용도가 낮았던 한국 정부는 마땅한 담보를 내놓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파독 광부들의 급여를 서독 은행에 담보로 잡히는 방식이 동원됐다는 설명이 여러 자료에 등장합니다. 다만 이 차관의 정확한 규모와 광부 파견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엇갈리는 지점입니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초청으로 서독을 공식 방문했습니다.
이 방문 기간 중 박정희 대통령은 함보른 탄광의 강당을 찾아 그곳에서 일하던 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연설 도중 애국가를 함께 부르는 과정에서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타국 땅에서 힘겹게 노동하던 이들에게, 조국의 대통령이 눈앞에 선 순간이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후, 남은 사람들과 돌아온 사람들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상당수는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서독에 남아 정착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간호사들 중에는 현지에서 결혼하거나 취업 비자를 이어가며 재독 한인 사회를 형성한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정부 차원의 조직적인 인력 송출은 1970년대 후반 들어 점차 축소됐습니다. 이후로는 개인 단위의 이주와 취업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습니다.
오늘날 재독 한인 사회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 이 시기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지하 1000미터의 노동과 병실에서의 밤샘 근무, 그리고 매달 고국으로 향한 송금. 그것이 1960년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남긴 기록입니다.
핵심 정리
- 1963년 12월 21일: 파독 광부 1진, 김포국제공항 출국
- 1963~1977년: 파독 광부 약 7,900여 명, 파독 간호 인력 약 1만여 명 서독 파견(자료마다 수치 차이)
-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서독 공식 방문, 함보른 탄광 회관 연설
- 파독 인력의 송금이 한국 경제 재건 초기 외화 확보에 기여했다는 평가
- 1970년대 후반: 정부 주도 인력 파견 사실상 축소·종료
- 이후 다수가 서독에 정착, 오늘날 재독 한인 사회의 초기 뿌리 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