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유신을 무너뜨린 열흘 — 10·26의 도화선이 된 부산과 마산

사이재

2026년 07월 18일

1979년 10월 16일 오전, 부산대학교 정문 앞. 하늘은 흐렸고, 학생 수백 명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날이 유신정권의 마지막 열흘을 여는 첫 장면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각오만 있었을 뿐입니다.

유신 말기, 곪아 있던 사회

1970년대 말 대한민국은 겉으로는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는 철저히 억눌려 있었습니다. 1979년 8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 폐업에 항의하며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 씨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반감에 불을 붙였습니다.

같은 해 10월 4일, 국회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을 제명했습니다. 부산 출신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영남에서 쫓겨나듯 물러난 셈이었습니다. 부산과 경남 시민들은 이 소식을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았습니다.

10월 16일, 부산대에서 타오른 함성

그날 오전 부산대학교 교정에서 시작된 시위는, 오후가 되자 시내 중심가로 번졌습니다. 학생들은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고, 어느새 일반 시민들도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처음엔 학생들만의 시위로 그칠 거라 여겼던 시민들도, 점점 늘어나는 인파를 보며 생각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다음 날인 17일에도 시위는 이어졌습니다. 부산 시내 곳곳에서 파출소와 관공서가 시위대와 충돌했습니다. 이 열기는 하루 만에 진압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비상계엄과 마산으로 번진 항쟁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정부는 10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공수부대가 시내에 배치되었고, 탱크와 장갑차가 도심 거리를 메웠습니다. 부산 시민들에게는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엄령은 항쟁의 불씨를 끄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인근 마산으로 옮겨붙었습니다. 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마산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고, 이틀 뒤인 10월 20일 정부는 마산과 창원 일대에 위수령을 발동했습니다. 부산과 마산, 두 도시가 열흘 사이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맞선 셈이었습니다.

청와대 안의 두 갈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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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s Masan1979-10-20.jpg ·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 CC0 / 가매인

같은 시각 청와대에서는 전혀 다른 긴장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하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강경 진압을 주장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정확한 발언 내용은 사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는 만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강경 대응이 사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산과 마산 현지의 민심을 직접 살핀 그는, 이 항쟁이 단순한 학생 시위가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균열의 신호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시각차는 이후 벌어질 사건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강경 진압을 말했고, 누군가는 그 반대를 고민했습니다. 그 갈림길에서 역사는 방향을 틀었습니다.

열흘의 항쟁이 부른 10·26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지 열흘 만인 1979년 10월 26일 저녁, 서울 궁정동의 한 안가에서 만찬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겨누었습니다. 유신체제의 심장부에 있던 인물이 유신체제의 정점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입니다.

10·26 사건의 배경에는 여러 정치적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연구자들은 부마민주항쟁에서 확인된 민심의 이반이 김재규의 판단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열흘간의 항쟁이 유신체제 붕괴의 직접적인 도화선 중 하나가 된 셈입니다.

광주에 가려진 이름, 부마민주항쟁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워낙 큰 비극과 역사적 무게를 지니면서, 부마민주항쟁은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부마항쟁은 유신 독재에 맞선 최초의 대규모 시민 저항이었고, 결과적으로 18년간 이어진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산과 마산의 거리를 메웠던 학생과 시민들의 이름은 대부분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외쳤던 함성은 분명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로 남아 있습니다. 2019년, 정부는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인 '부마민주항쟁 기념일'로 지정하며 이 항쟁의 의미를 공식적으로 되새겼습니다.

부마민주항쟁 핵심 연표

  • 1979년 8월: YH무역 여성노동자 농성 사건 발생
  •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국회 제명
  •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시위 시작, 부마민주항쟁 개시
  • 1979년 10월 18일: 부산 비상계엄 선포, 마산으로 항쟁 확산
  • 1979년 10월 20일: 마산·창원 위수령 발동
  • 1979년 10월 26일: 10·26 사건, 박정희 대통령 사망, 유신체제 붕괴
  • 201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기념일' 국가기념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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