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모든 것을 빼앗긴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 나혜석은 왜 행려병자로 죽었나

사이재

2026년 07월 12일

1948년 12월, 신원을 알 수 없는 노파 한 명이 병원에 실려 왔다. 기록에는 행려병자로 남았다.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유럽을 누비며 그림을 그렸고,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이름을 가졌던 여인이라는 사실을.

나혜석.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관리 집안의 딸로 자라 열여섯에 도쿄로 건너가 서양화를 배웠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쉰둘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행려병자로 세상을 떠났다.

도쿄 유학, 독립운동, 첫 개인전 — 한국 최초 여성 화가의 등장

Na Hye-sok 1920.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Na_Hye-sok_1920.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퍼블릭 도메인)
Na Hye-sok 1920.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Na_Hye-sok_1920.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퍼블릭 도메인)

1913년, 나혜석은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조선 여성이 서양화를 배우러 혼자 일본으로 건너간다는 것은, 당시로선 가족 전체가 감당해야 할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갔다. 유화 물감을 처음 손에 쥔 것이 그즈음이었다.

도쿄 유학 시절, 그녀는 그림만 그리지 않았다. 조선 유학생 모임에서 글을 쓰고, 여성의 권리에 대해 발언했다. '이상적 부인'이라는 글을 쓴 것도 이 시기다. 현모양처가 되라는 시대에, 그녀는 여성도 독립된 인격이어야 한다고 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나혜석은 경성에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됐다. 옥고를 치렀다. 석방 이후에도 붓을 놓지 않았고, 1921년 경성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조선 여성이 유화 개인전을 연 최초의 기록이었다.

파리의 화실 — 가장 빛났던 시간, 그리고 균열의 씨앗

1920년, 나혜석은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다. 결혼 전 그녀는 자유 연애의 권리와 예술 활동 보장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전해진다. 그 조건이 실제로 얼마나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요구 자체가 당시로선 전례 없는 것이었다.

1927년, 남편이 외교 업무로 유럽에 나가게 되자 나혜석도 동행했다. 약 2년에 걸쳐 파리, 런던, 베를린, 스페인을 돌았다. 나혜석은 그 어디서든 이젤을 세웠다. 〈스페인 해수욕장〉, 〈파리 풍경〉 같은 작품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조선 여성의 눈으로 포착한 유럽이었다.

파리에서 그녀는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최린을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훗날 나혜석 자신이 글로 남겼다. 감정이 생겼고, 관계가 있었다고. 1930년 귀국 직후, 남편 김우영은 이혼을 요구했다.

이혼 고백서 — 침묵을 거부한 여자의 글

Na Hye-sok in 1926.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Na_Hye-sok_in_1926.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퍼블릭 도메인)
Na Hye-sok in 1926.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Na_Hye-sok_in_1926.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퍼블릭 도메인)

이혼당한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대개 하나였다. 조용히 사라지는 것. 나혜석은 그 선택을 거부했다. 1934년, 그녀는 잡지 《삼천리》에 '이혼 고백서'를 발표했다.

고백서에서 그녀는 자신의 감정과 이혼의 경위를 상세히 썼다. 그리고 물었다. 왜 나만 죄인인가. 같은 상황에서 남성은 아무런 사회적 대가를 치르지 않는데, 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는 이 구조는 무엇인가. 당시로선 정면 도발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나는 왜 혼자만 이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하는가." — 나혜석 ‘정조 취미론’ 취지 재구성

최린에게는 정신적·물질적 피해에 대한 책임을 묻는 내용도 담겼다. 사회는 이 글을 진지한 문제 제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캔들로 소비했고, 그녀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글은 남았다. 당시 여성의 언어로 쓴 가장 날카로운 비판 중 하나로.

아이도, 집도, 화단도 — 이혼 이후 나혜석이 잃은 것들

이혼 이후 그녀가 잃은 것들이다. 네 명의 자녀는 친권이 남편에게 넘어갔다. 경제적 기반은 사라졌다. 화단의 지지도 끊겼다. 그녀와 교류하던 인사들이 하나둘 거리를 뒀고, 그림을 발표할 공간도 좁아졌다.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몇 차례 전시를 열었고 일부 작품이 팔리기도 했지만, 안정된 수입이 되지 못했다.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했지만 지면은 점점 줄었다. 건강도 나빠졌다.

  • 1896년 — 경기 수원 출생
  • 1913년 — 도쿄여자미술학교 입학, 서양화 수학
  • 1919년 — 3.1운동 참여, 체포 및 투옥
  • 1921년 — 조선 최초 여성 유화 개인전 개최
  • 1927~1929년 — 남편과 유럽 순방, 파리 체류 및 작품 다수 제작
  • 1930년경 — 귀국 후 이혼
  • 1934년 — 《삼천리》에 '이혼 고백서' 발표
  • 1948년 — 행려병자로 사망, 향년 52세 추정

사찰을 떠돌다 행려병자로 — 나혜석의 마지막

Na Hye-sok in 1936.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Na_Hye-sok_in_1936.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퍼블릭 도메인)
Na Hye-sok in 1936.jpg · 출처: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Na_Hye-sok_in_1936.jpg">위키미디어 커먼즈</a> (퍼블릭 도메인)

1940년대 그녀의 행적은 단편적으로만 전해진다. 충남 예산 수덕사 근처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고, 불교에 의지했다는 증언도 있다.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1948년 12월, 그녀는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행려병자로 분류돼 병원에서 생을 마쳤다는 것이 통설이다. 사망 장소와 날짜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 단정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이름 없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나혜석이 왜 이렇게 됐는지를 단순히 개인의 불운으로 설명하기는 무리다. 이혼한 여성에게 주어진 사회적 선택지가 없었고, 독립적으로 생계를 이어갈 구조도 없었으며,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언어 자체가 당시 사회에 부재했다.

나혜석 그림이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것

그녀가 남긴 그림들은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 소장돼 있다. 〈자화상〉, 〈스페인 해수욕장〉, 유럽 시절 스케치들. 그 작품들에는 당시 다른 화가들의 시선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봤다는 흔적이다.

나혜석은 자신이 어떻게 기억될지 알지 못한 채 죽었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더 또렷하게 만든다. 결말을 모른 채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로. 그 이름이 지금 이렇게 불리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끝내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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