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 대안동에 있던 진주청년회관. 백정 출신 상인 이학찬을 비롯해 강상호, 신현수, 장지필 등이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날 이들은 형평사 발기총회 겸 창립총회를 열었습니다. 조선 사회에서 수백 년간 가장 낮은 신분으로 취급받던 백정들이, 스스로 조직을 결성해 차별에 맞서기로 결의한 순간이었습니다.
형평사란 무엇인가 – 형평사 뜻

형평사(衡平社)는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결성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 단체입니다. '형평'이라는 말은 저울처럼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평평한 상태, 즉 평등을 뜻합니다.
백정이라는 신분 때문에 겪어온 차별을 철폐하고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겠다는 뜻을 담아 이 이름을 지었습니다. 형평사라는 이름 자체가 이 단체의 목표를 그대로 보여주는 셈입니다.
백정, 신분제가 사라진 뒤에도 남은 차별
1894년 갑오개혁으로 조선의 신분제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백정 자녀는 학교 입학을 거부당하는 일이 잦았고, 혼인이나 마을 공동체 참여에서도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호적에 백정 출신임을 구분해 표시하던 관행이 남아 있었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1923년 4월 25일, 진주 청년회관의 결단
형평사 창립을 이끈 인물은 백정 출신의 성공한 상인 이학찬이었습니다. 그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음에도 자녀 교육과 사회적 대우에서 여전히 차별을 겪었고, 이것이 조직 결성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 강상호와 신현수, 그리고 일본 유학 경험이 있던 백정 출신 지식인 장지필 등이 뜻을 함께했습니다. 1923년 4월 25일, 이들은 진주 대안동의 진주청년회관에서 형평사 발기총회 겸 창립총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약 20일 뒤인 5월 13일, 진주좌(진주극장)에서 형평사 창립축하식이 별도로 열렸습니다. 청년회관의 창립총회와 진주좌의 축하식은 날짜와 장소가 다른, 엄연히 별개의 행사였습니다.
형평사의 '衡平' 두 글자에는 저울처럼 치우침 없는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형평사의 확산과 전국적 반발
창립 이후 형평사는 빠르게 전국으로 조직을 넓혀갔습니다. 각 지역에 지사와 분사가 설립되면서 형평운동은 진주라는 한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사회운동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확산과 함께 반발도 거셌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백정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 의식으로 인해 형평사 활동가들이 이른바 반형평운동, 즉 조직적인 배척과 충돌에 맞닥뜨리기도 했습니다.
형평운동이 남긴 것
형평운동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이어졌지만, 일제의 감시와 내부 노선 갈등 속에서 점차 힘을 잃어갔습니다. 1935년에는 조직 이름을 대동사로 바꾸며 성격이 달라졌고, 이후 전시체제가 강화되며 활동은 사실상 위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형평사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특정 신분 집단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차별 철폐를 요구한 드문 사례로 평가됩니다. 이는 이후 한국 인권운동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대목입니다.
형평사 운동 핵심 연표
- 1894년 – 갑오개혁으로 조선 신분제 법적 폐지
- 1923년 4월 25일 – 진주 청년회관(대안동)에서 형평사 발기·창립총회 개최
- 1923년 5월 13일 – 진주좌(진주극장)에서 형평사 창립축하식 개최
- 1920~1930년대 – 전국으로 형평운동 확산, 반형평운동과 충돌
- 1935년 – 조직명을 대동사로 변경, 이후 활동 위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