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종로 주먹대장에서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사이재

2026년 07월 30일

1930년 1월 24일, 만주 하이린의 정미소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독립운동가 김좌진이 흉탄에 쓰러졌습니다. 1889년에 태어나 마흔 해를 조금 넘긴 삶이었습니다.

그가 눈을 감았을 때, 1918년 6월생인 김두한은 만 열한 살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만주 벌판에서 독립군을 이끌다 세상을 떠났고, 다른 한 사람은 식민지 조선의 도심 한복판에 남겨졌습니다. 이 낙차가 이후 김두한의 인생 전체를 규정하게 됩니다.

김좌진, 청산리의 지휘관

31세 무렵의 김두한 ·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퍼블릭 도메인)
31세 무렵의 김두한 ·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퍼블릭 도메인)

김좌진은 1920년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 지휘관이었습니다. 1925년에는 만주에서 신민부를 창건해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을 맡으며, 재만 동포 사회의 조직화와 무장 항일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다만 김두한이 김좌진의 친아들인지를 두고는 자료가 갈립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기술하지만, 1990년 김용옥이 친자 여부에 의문을 제기한 뒤 논란이 이어져 왔습니다. 이 글은 어느 한쪽을 단정하지 않고, 기록이 갈린다는 사실을 밝혀 둡니다. 다만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이름표가 김두한의 삶을 따라다녔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종로 거리에서 자란 아이

김두한은 1918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정규 교육이나 안정된 가정의 보호 없이 자랐습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도시 빈민 청소년들에게 거리는 생존의 공간이자 사실상 유일한 사회였습니다. 10대 후반부터 그는 종로 일대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혼마치와 종로, 식민지 뒷골목의 대립구도

일제강점기 서울 도심의 상권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지금의 충무로·명동 일대인 혼마치는 일본인 자본과 그 이해관계를 등에 업은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고, 종로는 조선인 상권의 중심이었습니다. 김두한은 이 종로 쪽 청년 조직을 이끄는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다만 이 시기 무용담의 상당수는 훗날 영화와 드라마를 거치며 극적으로 각색됐다는 점도 짚어야 합니다. 실제 있었던 일과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를 정확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해방 정국, 거리의 주먹에서 정치의 무대로

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는 좌우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공간이 됐습니다. 김두한은 대한민주청년동맹 등 우익 청년단체에 몸담으며 좌익 세력과의 물리적 충돌 최전선에 섰습니다. 비슷한 시기 이정재 등 여러 인물이 이른바 '정치깡패'라는 이름으로 정국에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1960년 4·19 혁명 뒤 재판에 넘겨졌지만, 실제로 중형이 확정된 것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의 혁명재판에서였습니다. 이정재는 그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정당과 정치 세력이 거리의 완력을 동원하던 해방정국의 어두운 단면이었습니다.

1954년, 종로을에서 얻은 첫 금배지

풍문여고 졸업식에 참석한 김두한 ·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퍼블릭 도메인)
풍문여고 졸업식에 참석한 김두한 ·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퍼블릭 도메인)

해방 이후 몇 년이 흐르고, 김두한은 거리의 주먹에서 제도권 정치로 무대를 옮깁니다. 1954년 5월 20일 치러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그는 서울 종로을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정당의 조직력 없이, 그가 젊은 시절 이름을 알린 바로 그 거리에서 얻어낸 승리였습니다.

1965년, 용산에서 다시 국회로

첫 임기가 끝난 뒤 정계에서 멀어졌던 김두한은 1965년 다시 국회로 돌아옵니다. 그해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한 민중당 의원들이 의원직을 사퇴했고, 그중 서민호 의원의 사퇴로 서울 용산구가 궐석이 됐습니다. 1965년 11월 9일 치러진 이 보궐선거에서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종로가 아닌 용산에서 얻은, 그의 두 번째 금배지였습니다.

종로 주먹대장이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그 사이에는 해방정국이라는 격변의 시간이 놓여 있었습니다.

국회를 뒤흔든 오물 투척 사건

1966년 9월 22일, 국회 본회의장이었습니다.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정국이 들끓던 상황에서, 김두한은 국무위원들을 향해 인분을 뿌렸습니다. 부정부패에 대한 항의였습니다. 그는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고, 1966년 의원직을 사퇴했습니다.

이 사건에는 그를 부정부패에 맞선 상징적 인물로 기억하는 시선과, 국회의 권위를 훼손한 사건으로 보는 시선이 함께 남아 있습니다.

협객과 정치인 사이, 남은 이야기

김두한은 1972년 11월 2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종로의 주먹대장에서 종로을과 용산, 두 지역구의 국회의원까지 — 그의 삶은 해방 전후 한국 사회가 겪은 혼란과 격변을 고스란히 관통합니다. 신화화된 무용담과 실제 정치 이력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있습니다. 그 간극을 메우는 일은, 사료를 하나씩 짚어가는 작업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 1889년 김좌진 출생
  • 1920년 김좌진, 청산리 전투 승리
  • 1918년 6월 23일 김두한 출생
  • 1925년 김좌진, 만주에서 신민부 창건
  • 1930년 1월 24일 김좌진, 만주 하이린에서 피살
  • 일제강점기 김두한, 종로 청년 조직의 중심 인물로 성장
  •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주청년동맹 등에서 활동
  • 1954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선거, 서울 종로을 무소속 당선
  • 1965년 11월 9일 제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 서울 용산구 한국독립당 당선
  • 1966년 9월 22일 국회 오물 투척 사건 → 수감, 의원직 사퇴
  • 1972년 11월 21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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